05.18.2025. 주일설교 이증복 목사
본문: 마태복음 5:1-5
제목: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5.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1. 산상설교의 말씀을 읽을 때 제일 먼저 마음 속에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해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의 순례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고백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를 읽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만약 내가 온유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세상에서 나에게 땅을 주실 것이다 합니다. 그래서 첫번째로 이 말씀의 잘못된 이해가 무엇이고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당시의 예수의 유대인 제자들의 잘못된 이해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에서 땅을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출3:7-8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굽에서 구원을 하시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배경을 가진 제자들이 떠올리게 되는 땅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2) 현대를 살고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이해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하여 온유한 자가 되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온유한 자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셨듯이 나에게도 땅을 주소서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일차적인 이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아닙니다.
3)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올바른 이해입니다.
먼저 오늘의 말씀에서 온유한 자가 받는 땅의 의미는 온유한 자가 받게 되는 모든 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온유한 자가 되면 진짜로 땅을 소유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극치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시작을 하셨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완성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눈에 보이도록 온 세상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받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나름의 생각인 현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현시대에서 땅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온유한 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복적인 신앙이라 합니다. 기독교적인 가치에 기반을 둔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올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순간에 이 땅에 임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진정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온유한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게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4) 그러면 왜 땅에 대한 시각이 서로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일까요?
반복해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서로 다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적이고 미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저들은 이 세상에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 나라에 속하여 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들에게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가치관이 다른 경우 같은 단어나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서로 이해하는 것이 다르게 됩니다. 아니 어떤 경우는 정반대로 이해를 합니다. 간단한 예로 정치인들을 보십시요. 심지어 이 세상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들임에도 공화당에 열성인 사람과 민주당에 열성인 사람들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백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만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올바르게 듣고 이해를 하고 실천을 하게 될 것입니다.
2.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온유한 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유한'이라는 단어에서 시작을 하면 안됩니다. 온유한 성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준 두 개의 미덕에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온유한 자는 자신이 죄로 인하여 파산한 자임을 아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래서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온유한 성품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온유하다'라는 용어를 사전적인 정의로만 알고 있다면, 성경이 전해 주고자 하는 온유한 자의 아주 일부분만을 이해하게 되어 말씀의 복된 약속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1) 우리가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인지 좀더 쉽게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온유한 자라고 알려 주신 분들을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세입니다.
민수기 12:3, 7, 8.
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온 집에 충성함이라.
8-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사건은 모세가 구스 여자를 부인으로 삼은 후에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던 상황에서 나온 모세의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온유한 자라 평가를 하신 후에 아론과 미리암을 책망하시면서 모세가 왜 온유한지에 대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계신데, 그 중에 가장 주의 깊은 것은 모세의 충성이고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성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충성을 합니다. 그리고 늘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살아 가는 사람입니다. 그의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의 비방과 고소에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드러난 온유하심은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 비방자들에 맞대응하여 싸우지 않고 성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또한 당시의 가장 강력한 나라인 로마제국의 관리인 빌라도의 위협에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가르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 자랑 가운데 자신을 비방해도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세운 자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복음을 더 잘 드러내고자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온유한 자의 모범이신 모세와 바울과 우리 주님을 통해 온유하다는 의미가 결코 수동적이고 분쟁이 없이 잠잠한 자들에게 있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온유한 성품을 가진 분들의 특징은 자신을 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인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즉,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킨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길들여진 자가 가진 성품이 온유한 자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다른 이들의 비방과 공격에 자기 연민이나 자기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죄인으로서 자기 권리가 없는 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온유하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우리의 아픔과 연약함을 다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알려주는 온유한 자들은 이미 죄로 인해 죽은 자로서 넘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온유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하신다면, 모세와 바울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가 자기를 무시하고 비방을 하는 소식을 듣고도 다시금 담대히 편지를 보내며 기도를 하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 되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영광의 보좌에서 내려오사 사람들의 온갖 모욕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시는 것이 신앙생활의 올바른 지침이 될 것입니다.
2)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겸손과 온유를 같은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와 온유한 자를 구분하여 설명을 하겠습니다.
2-1) 겸손과 온유한 성품 둘 다 다른 이와 나 자신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나는 성품인 것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2-2) 차이점이 중요합니다. 먼저 겸손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성에서 다른 이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반면에 온유한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겸손한 자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더 높이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겸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예수를 닮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형제 자매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2-3) 온유한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들 안에 만드신 성품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온유한 성품을 소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길들여지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만들어 주신 성품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좌우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드리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충분히 온유한 자가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해 가면서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온유한 자의 열매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3) 온유하다의 일반적인 이해와 성경이 말하는 온유하다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어 단어로 사용된 '온유한'이라는 'meek'는 유순한이나 연약한이나 무해한 또는 패기가 없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은 완전히 수동적이어서 온유한 자는 무엇인가 적극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정확하게 성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온유한 자의 성품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전하는 온유한 자의 성품은 절대로 수동적이지도 않고 연약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에 누구보다도 용감합니다. 아주 적극적입니다. 온유한 자는 권력자들이 하는 불의에 절대로 굴복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루기 위해 움직이는 활동가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드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 변호를 위하여 적극적이지는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다툼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화평을 하는 자를 온유한 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소극적인 면에서는 자신을 위한 다툼을 일으키려 하지 않지만, 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유한 자는 용사같이 앞서 나갑니다.
3. 정리와 적용을 하겠습니다.
첫째로, 온유한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데 아주 적극적입니다. 지금까지는 온유한 자에 대한 설명에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로서 심지어 순교까지 기꺼이 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설명한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온유라는 개념과는 다른 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번째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안 싸우는 것'과 비슷한 개념에 있는 온유한 자의 특성입니다.
민수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가나안 땅을 자기들이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가운데 모세를 비방합니다. 모세는 이 비방을 듣고 맞서 싸우지 않고 모세는 온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엎드립니다. 심지어 돌로 치려는 순간에도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정탐꾼을 보낸 것이고 땅을 정탐한 자들이 믿음 없음에서 나온 부정적인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 들고 그들이 자신에게 하는 비방과 불평에 맞서 싸우며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전서 2:23의 증언에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며 위협을 하지 않으셨다 합니다.
구약에서 모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의 대표입니다. 성경전체에서 예수는 가장 온유한 분이십니다. 두 분의 특징은 사람들의 비방과 욕에 대하여 자기들의 권위와 능력을 사용하여 맞서 싸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받게 된 온유한 성품의 열매를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에서 온유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나에 대한 잘못된 비방을 참는 것입니다. 비방을 듣자마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중에 어느 여성도의 무고한 고소를 받았었습니다. 그 여성도는 어느 장로와 계략을 꾸며 목사를 교회에서 내쫓으려는 계획으로 목사가 자기를 성추행한 것으로 교회에 보고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일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고 증거는 없었지만, 한 동안 교회가 시끄러워졌습니다. 목사님도 여러 사람에게 비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그 여성도가 진정으로 회심을 하고 자기의 잘못을 당회에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결백이 증명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오래 참으시고 자신을 위해 맞서 싸우지 않으신 것을 통해 성도들은 예수님의 온유함을 닮은 목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더욱 목사님을 신뢰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물론 목사님 자신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서는 언제나 담대하게 맞서 싸우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자기를 향한 비방은 참지 않고 즉각적으로 싸우지만, 교회와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말을 듣게 되면, 잘 참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는 온유한 자는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오늘 말씀에서 복되다 하신 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