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1.2025. 주일설교 이증복 목사
본문: 마태복음 6:7, 누가복음 10:29-37
제목: 자비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6: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누가복음 10:29-37.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 버리고 갔더라. 마침내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이틀치 품삯)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비로운 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의 예수님의 예화가 가장 알맞게 우리의 이해를 도와 줄 수 있습니다.
1. 산상설교의 구조를 점검함으로써 자비로운 자에 대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팔복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부분인 3-6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번째 부분인 7-10절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드러내야 하는 복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첫부분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드러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해 자신이 파산한 자임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와 다른 이들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하며 삶을 무너뜨리게 하는지를 알고 가지게 되는 깊은 슬픔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하는 자들입니다. 모세와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예수를 닮아 가고자 하며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게 하는 일에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3-6절의 복이 있는 자들의 특징은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지게 하는 미덕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두번째 부분인 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의 참 제자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과 관련된 복이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비로운 자(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로서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이제부터 오늘의 긍휼히 여기는자(자비로운 자)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2.1) 자비로운자는 누구인가 의문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자비로운 자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알기도 쉽고, 우리가 실천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대다수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고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마태복음 5:7절도 역시 조건절로 쓰여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건절 문장으로 쓰여져 있음으로 잘못 이해를 하고 있는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가 있습니다. 이 말씀도 동일하게 '우리가 용서를 먼저 하면'이라는 전제로 용서를 해야지만 용서를 받는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반에 걸쳐 알려 주고 있는 용서에 대한 말씀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기에 우리도 자비한 자가 되어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는 우리가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된다면,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구원이 은혜라는 진리를 왜곡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내가 먼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주실 것이라는 N- shape의 신앙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U-shape의 신앙입니다.
2.2) 하나님이 먼저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U-Shape 의 신앙이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자비(용서)를 베푸사 구원을 해주심(먼저 내려주신 것이다) —>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감사하며(올려드린다) 다른 이들에게 받은 자비와 용서를 드러내는 자가 된다 —>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며 사는 자에게 더 자비를 베푸신다(더 내려 주신다) —> 더 내려주신 자비를 감사하며(올려 드린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행한다 —> 마지막 심판 자리에서 자비를 드러내며 살았던 이들에게 분명하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주신다(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올바른 이해의 순서를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 기독교가 타 종교와 아주 분명하게 다른 것을 보여 주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은혜의 신앙으로 U-shape의 신앙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먼저 읽겠습니다.
요한일서 4:19, 20.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사랑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죄인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으로 죄로 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용서 받았음의 증거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병들고 눈 먼 자로 사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구원을 받은 그들은 그것에 대한 증거로 다른 이들이 어려움과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자비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고도 다른 이가 어려움에 있을 때에 자비와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자비와 용서를 받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 대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우리가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호흡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로운 자(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자비를 받은 자로서 자비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자비로운 자로서 살았던 그러나 때때로 죄를 지었던 자임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즉,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2.3) 그러면 하나님께 자비를 받은 자로 드러나는 삶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누군가를 곤궁한 처지나 속박에서 구해내는 너그러운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자비를 죄책의 속박에서 구해내는 용서를 의미하기도 하고, 치유나 베품을 뜻하는 구원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치유나 베품이 더 자주 나옵니다.
마태복음 5:2절의 구제하는 자선행위나, 마태복음18:21-35 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를 몇번이나 해 주어야 하는 질문에서 일곱번씩 일흔번을 하라 하신 것에서 용서의 의미가 자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25:31-46에서 인자가 다시 올 때 양과 염소를 심판하시는데 염소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염소는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염소는 헐벗은 자를 옷입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병든 자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판결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염소들이 바로 자비가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비 없는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께 자비를 받은 적이 없는 자라는 증거였습니다. 결국 최후의 심판자리에서 하나님에게서 자비를 거부당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로 책망을 제일 크게 받은 자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자비)과 믿음을 버렸도다."(마23:23)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드리는 제사보다 긍휼(자비)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호6:6, 마9:13).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인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여인임)과 결혼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자비)과 회복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호세아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 주시며 그들로 돌이켜 자비를 가진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그러므로 자비로운 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반응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죄의 종으로 사탄에게 착취를 받던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를 주심으로 구원의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쳐 주셨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식사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어려움에 있는 자들을 돌보는 것과 병든 자를 찾아 보며,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는 교제가 바로 자비로운 자로 사는 것입니다.
2.4) 그러나 우리가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함에도 잘못된 자비를 드러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공의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불법적인 일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오셨고, 베드로에게도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해주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마12:31-32절에서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이세상에 드러낼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분명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죄를 지속적으로 짓는 자들에게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거슬리는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눈을 감고 미소를 짓는 자가 되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말씀이 느긋하여 화내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주는 자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하는 죄에 대해 분노가 없는 행위를 자비로운 자(긍휼이 있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려움에 있는 자들이나 헐벗은 이들,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어려운 이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가난함에도 그에게 돈이 있다면 술을 사거나 도박을 하거나 심지어 마약을 하는 경우에는 돈을 주는 것은 자비를 행하는 것이 아닌 죄를 조성하고 그를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돈을 주어) 악한 일에 참여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도움은 잘못된 긍휼(자비)을 베푸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로운 자(긍휼히 여기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로운 행동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거의 죽게 된 자를 보고 그가 도움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도가 있을지도 모르는 환경에도 그의 자비를 베푸는 것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관에 들어가 그 다친 사람이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상처를 싸매주고 여분의 돈까지 주어 회복의 시간 동안 여관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질적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에게 유익한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올바른 자비를 베푸는 것이 됩니다.
2.5) 마지막으로 자비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부터 오는 변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와 사탄의 노예였다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힘입어 해방된 자는 나 자신이 누구였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또한 믿지 않는 다른 이들도 동일하게 죄와 사탄의 노예인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을 죄의 노예로서 비참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존재로서 생각을 합니다.
3. 정리를 하자면, 자비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은 마음의 태도부터 시작을 하여 언어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안 믿고 사는 어떤 이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로서 자비의 눈으로 그들을 보며 복된 소식인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이들을 상종하지 말하야 하는 오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죄와 죄인을 동일하게 보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의 태도와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먼저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를 드러내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더욱 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더불어, 자비로운 자로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임을 확신하게 되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서 두려움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긍휼하심)를 경험하게 될 것을 소망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