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6.2025. 주일설교 이증복 목사
본문: 마태복음 5:17-20
제목: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앞 단락의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는 “너희 빛이 사람 앞에서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착한 행실을 하라는 말씀을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착한 행실의 도덕적인 기준은 모세의 율법을 풀어서 만든 장로들의 계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쪽에서는 예수가 율법을 폐하려 왔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 동안에 장로들이 만들어 놓은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이 형식적인 것에 치우쳐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지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행동으로 율법을 준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신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 방식의 율법의 준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기에 실제적으로는 그들이 율법을 폐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지금부터 예수께서 율법에 대한 생각들이 무엇인지 말씀으로 전하겠습니다.
1.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 여기서 말하는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토라로 부르는 율법은 모세 오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선지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율법의 구성은 첫째로 과거 사건을 기념하여 지키는 규례이고 둘째는 종교적, 의식적인 규례이고, 셋째는 도덕법, 사회적인 규례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보통 예식법, 도덕법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우리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성경에 그렇게 분류하여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세세한 행동 지침들로 유대교 전통으로 내려오는 613개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전통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에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선지자는 어느 특정한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예수께서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다라는 말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3:15절의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도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54-56절에서 예수를 잡으러 온 자들을 하늘의 군단으로 불러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잡히신 것도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는 순종은 계명의 외적인 준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하는 규례들이 예수의 십자가 희생제사로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키며 기념하였던 유월절이 예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러 오신 것입니다.
3) 현대를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예수 메시아 이전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율법에 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 다니던 시기의 일입니다. 당시에 저는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청년회 임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식당의 대표 음식이 돼지 선지국이었습니다. 분명 성경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피도 먹지 말라 한 것으로 아는데, 왜 목사님은 피가 들어간 선지국을 파는 식당에서 회식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얼핏 듣기로는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성령께서 이 땅에 강림하심으로 완성이 된 맥추 감사절 절기를 열심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떤 원칙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교회는 그 원칙을 교육해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에게도 구약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궁금증이 있을 것이라 여겨 집니다.
오늘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의 규례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된 것은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유월절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맥추절 또는 칠칠절 절기는 초대 교회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성취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절에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창조와 출애굽을 기념하던 안식일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새 창조의 새 안식을 기념하는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이같이 구약의 절기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온전하게 되어졌습니다.
그 다음으로 구약의 음식에 대한 규정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고기를 구별되게 먹는 것은 이방인들과 다른 신앙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아무동물이나 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는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로 개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옛 식습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반면에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이들은 옛 종교적인 관습을 지켜 피를 먹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서로 다른 식습관으로 서로의 믿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서로 간에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피를 먹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금하는 권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음식 자체로 교회 내에서 서로 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다면 그것을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피가 들어간 선지국이나 순대에 대한 지침도 동일합니다. 교회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면, 각자의 양심에 따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피에 대한 문제보다는 개를 식용으로 하는 것이 더 커다란 논란 거리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관심을 가지고 주의해야 하는 식습관이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출석을 하였던 교회에서는 여름 성경학교를 마치고 교사들이 다 같이 보신탕을 먹으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은 어느 교회도 식사 모임을 보신탕으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못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음식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에게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이미 깨끗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10:11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4:4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의 도덕적인 부분은 여전히 중요하게 지켜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그들도 거룩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도덕적인 계명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도록 잘 지도해 줄 것입니다. 동일하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도 역시 날마다 정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도덕적인 지침이 되는 율법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 19:2, 20:7)
2.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가 율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율법이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한 중요성을 예수님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경우가 생길 지라도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일점 일획이 없어지지 않는 다는 말이 아주 작은 것까지 준수해야 한다는 권고는 아닙니다. 아주 작은 부분도 그 율법이 완전하게 이루게 하는 역할에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3.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계명에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말씀은 가르치는 자가 이 시대에 안 맞는 것이다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교사는 그가 생각하기에 이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 여겨 그 계명을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계명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22:36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대답해 주셨습니다. 즉, 세세한 구분이 아니라 모든 구약의 율법을 포함하는 진정한 의미를 명심하고 모든 것에서 중요한 의미를 두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판단에 율법을 작은 것과 큰 것을 나누어 버릴 것과 지킬 것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하며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선택적으로 가르치고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설교합니다. 제가 있던 선교 단체는 선교사로 나가게 하는 동기 부여를 주는 말씀을 선택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어떤 교회의 설교는 정치적인 이슈가 주요 주제입니다. 현대의 교회에서 제일 설교하기 어려운 제목이 이혼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이곳저곳에서 찾아서 설교를 하기보다는 성경에서 하나의 본문을 정하고 순서대로 자세히 설교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4.
20절: 네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다음에 오는 가르침이 중요한 것이라는 강조입니다.
그 강조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입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는 이와 같았습니다.
안식일에 1마일 이상 걷지 않기, 불 피우지 않기, 두 손을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지켰습니다.
정결의식을 지키는 방식은 음식을 먹기전에 반드시 의식적으로 손을 씻는 규례를 지켰고, 이것을 안 지키는 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십일조는 아주 작은 야채나 작은 씨앗을 꼼꼼하게 분류를 해서 받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건을 나타내기 위해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경문(성경말씀을 넣는 작은 가죽상자)과 옷의 네 귀퉁이에 꼬아서 만든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피하였습니다. 이방인, 죄인, 세리 등과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 세리 등과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는 율법이나 규칙을 추가로 지키라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제일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통상적인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롭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만을 잘 지켰을 뿐입니다. 손을 잘 씻었지만 마음의 탐욕과 죄는 씻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주된 이유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심지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다른 성경의 구절을 가지고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고르반입니다“라고 선언을 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으니 부모에게 줄 수가 없다는 핑계로 삼았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헌물이라는 의미로 희생제물이나 곡식제물이나 돈 등에 사용되는 모든 총칭입니다.
2) 그러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더 나은 의는 무엇일까?
이 의는 언제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나은 의는 언제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온전히 율법을 지키시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의를 믿음으로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착한 행실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의 제자들이 같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바리새인들과 분명하게 다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 율법을 순종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겉을 깨끗하게 합니다.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속에는 죽은 시체가 있어 썩어 냄새가 나지만 겉은 회로 잘 막아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율법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가 이루신 의를 힘입어 감사함으로 율법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마음의 경향성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율법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 가고자 합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구제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자들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3)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대한 오해부터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구원 받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산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이들은 천국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천국의 백성들 간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차이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지난주 설교의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이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서 소금의 짠 맛을 잃고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세상의 빛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외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의무로 여기고 있다면, 그들은 천국(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입니다.
다음 주부터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율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나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의 외적인 규칙이 아닌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