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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2025. 주일설교 이증복 목사 
본문: 마태복음 5:13-16
제목: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나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서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인을 가장 알맞게 표현하는 성경의 비유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중에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잘 드러내는 은유는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미지는 무엇이 가장 알맞은 것일까요?

1. 먼저 그리스도인을 성경에서 말하는 비유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이미지들을 살피는 동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다 말하고 있는데, 나는 정말로 그와 같은지 자신을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의 양입니다.
양이 주는 이미지가 강조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곳에서 풀을 먹습니다. 목자가 쉬게 하는 곳에서 휴식을 갖습니다.
두번째는,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포도나무 되신 예수 안에서 살고 있을 때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몸과 삶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네번째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의 신부입니다. 
신랑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신랑되신 예수께 알맞은 신부가 되도록 정결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죄에 물들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번째는, 그리스도인은 병사나 운동선수나 농부로 비유를 합니다. 이 말은 이해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훈련하고 인내하며 열심히 일하는 이미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유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은유는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외딴 곳에 홀로 사는 자는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2-1)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갑자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신 것일까요?
세상은 마치 썩어져가는 커다란 고기 덩어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날마다 죄라는 균들에 의해 날마다 더 나빠져 가고 날마다 더 나쁜 냄새가 나고 있는 고기 덩어리와 같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지은 이후에 계속해서 죄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더욱 더 죄로 인해 부패해져 가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 은총으로 인해 아직도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회복되는 유일한 길은 세상을 부패시키는 죄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구세주의 보혈로 죄가 정결하게 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 새 사람이 소금이 되어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2-2) 소금의 역할과 소금이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첫번째는, 소금은 고기 덩어리의 부패를 방지합니다. 소금이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고기 덩어리는 부패가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몽이라는 맛있는 음식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인 후에 수개월에서 수년간 건조시켜 만듭니다. 소금에 절여진 돼지 뒷다리는 수년간의 시간이 지나도 부패로 인한 혐오스러운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맛이 있는 음식이 됩니다. 
두번째는, 소금이 고기 덩어리의 부패를 방지하거나 맛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금이 녹아서 스며들어야 합니다. 녹아서 스며드는 소금만이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소금이 녹지 않고 자신의 모양 그대로 있으면 고기에 스며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자존심이나 자기를 높이 세우는 것으로는 세상에 소금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으로는 세상에 스며들어 부패를 막거나 맛을 내거나 하는 소금은 절대로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소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맛을 잃은 소금이라 하는 것입니다.

2-3) 소금이 맛을 잃어 버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진짜로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진짜로 맛을 잃어 버린 경우는 언제 생기는 것일까요?
소금은 소금 자체로는 짠맛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흰색인데 하얀 석회와 섞이거나 진흙과 같은 불순물들과 섞이면 그 짠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일 고기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염장(소금)에 자기도 모르게 많은 양의 흰색의 불순물(밀가루나 석회)을 섞게 된다면, 그 고기는 상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금이 짠맛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상 관습을 따라 살고 있다면, 바로 소금에 많은 불순물이 섞인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불순물들과 섞인 소금은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밟히게) 될 것입니다.

2-4)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으로서 스며드는 방식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으로서 사회 활동과 정치 행위에 참여를 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도덕적이고 남을 도우며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스며드는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와 관심사에 맞추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은사에 따라 충성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세상의 소금이 될 수도 있으나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소금으로 자신을 녹여 세상에 스며드는 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는 정치적인 참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어떤 교회나 교단의 목사의 정치 성향으로 야당을 지지하거나 반대로 여당을 지지한다면, 반대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교회에 적대감을 가지게 하여 복음의 문이 닫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사회적인 문제들에 편을 가르는 일을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는 복음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기본 개념은 공화당의 사람들도 죄인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민주당의 사람들도 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이성관을 가진 자들도 죄인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성관을 가진 자도 죄인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이러한 정치적인 편가르기에 서게 된다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엄청난 악영향을 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개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을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자주 있게 된다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3-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일까요?
소금의 은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빛의 은유에서 전제하는 것은 세상은 죄로 인해 어둡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햇빛으로 가득한 낮에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 것은 아담의 반역 이후에 사람들이 아담을 좇아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아 자신을 자랑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을 하며 내게 좋은 것이면 그 무엇이든지 얻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정말로 캄캄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살기 어려운 사회는 그 사회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없는 곳입니다. 심지어 독재적인 통치자가 있는 곳이 그러한 통치자조차 없는 사회보다는 낫습니다. 소말리아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적과 납치와 테러가 일상이며 모든 이들이 기본적으로 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헤이티는 갱단들이 수도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남수단은 정부가 기능을 상실하여 약탈과 강간이 만연하고 있으며,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UN의 구조 활동조차 엄청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이라는 사회는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고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온 세상의 주권자를 거부하고 있는 어두운 곳입니다. 

3-2) 우리도 이전에는 어둠에 속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5:8-11.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러면 어둠에 속하여 있던 우리가 어떻게 빛의 자녀가 된 것인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 세상의 왕으로 삼고 사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서 세상에 빛을 비추는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3-3) 세상의 빛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 보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불의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곳에서 진실되고 공의를 행하고 모든 선함으로 사는 것이 세상의 빛이 되어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둠에 속하여 있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으로 살 때에야 그들은 자신들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빛이 되는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얼마나 어두움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있는 이 빛을 궁금해 할 것입니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이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빛을 싫어했던 바리세인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박해하였듯이, 우리가 세상에서 빛으로 사는 것을 싫어하여 우리를 또한 박해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3-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빛의 자녀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세상의 빛으로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빛의 자녀임에도 어리석은 자가 있습니다. 

15절 말씀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밤에 집을 밝히기 위해 등불을 켭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말(통)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요. 그 등불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하게 그 집은 다시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세상의 빛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어 집을 다시 어둡게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사는 것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또한 오직 교회 안에서 교회 식구들만 만나고 교제하는 것도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3-5) 우리가 사람 앞에서 빛으로 비추라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의 착한 행실(빛이 되는 삶)으로 빛 되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우리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를 유명하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한 행동을 하기 전에 이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4. 이제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이 썩어져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어 살기 좋은 곳이 되도록 맛을 내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빛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소금이 되는 것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의 차이입니다.
먼저 소금이 방부제의 역할이나 맛을 내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녹아서 스며들어야 합니다. 부패해가는 세상 속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소금은 반드시 조용히 세상 내부로 스며들어 부패를 막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상에 스며들어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존심을 그대로 가지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행동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을 녹여 부패한 세상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소금의 짠맛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눈에 띄게 외부적으로 활동을 해야 합니다. 소금은 내부적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빛은 외부적으로 드러내어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내부에 조용히 스며드는 동시에 세상의 빛이 되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삶을 동시에 수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경계를 나누기가 어렵기에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은 눈에 띄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띄는 행위를 하라는 것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드러나게 하는 거짓이 없는 행동이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나 공의를 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이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그 빛으로 인해 볼 수 있게 비추어야 합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집의 가장이 일요일이 되면 양복을 입고서 두세 시간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의 집 식구들은 어느 누구도 그 남자가 외출을 하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남자는 나이가 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유품을 정리하던 자녀들과 부인이 성경을 발견하게 되어 그가 지난 20여 년 간 일요일마다 교회에 다녔던 것을 알게 됐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것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신 역할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님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촉구하겠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사십시요."

기도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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