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5.2025. 주일설교 이증복 목사
본문: 마태복음 5:9, 고린도후서 5:18-20
제목: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고린도후서 5:18-2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로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1. 예수님의 가르침과 평화 추구에 대한 맥락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정치적, 군사적 투쟁으로 로마에게서 해방을 해 주어 새 이스라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유대인인 제자들도 메시아이신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을 보면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수단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를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던 제자들에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본적인 생각을 바꾸기를 원하시며 가르치신 교훈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전쟁 없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20세기에 두 번의 세계 대전의 참상을 겪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없는 것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오는 것이라 생각을 하고, 그들은 이러한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지대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여러 나라들이 UN이 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평화 유지군을 통해 갈등을 중재하며 평화유지를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이것에 더하여 나라 간에 전쟁을 국가 정책으로 삼지 않게 하려는 조약을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단체들이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교회에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산상설교의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는 말에 주목을 하고 평화를 만드는 행동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끊임없는 작고 큰 전쟁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는 인종학살이 자행 되었으며 동남 아시아에서는 종교 간의 학살도 있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얀마의 지도자 아웅산 수지는 로힝야족 대규모 학살에 방관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학살의 주체 세력인 미얀마 군인들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도리어 변호를 했습니다.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요? 사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확실합니다.
2.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지난 주에 이어 다시 한번 강조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을 하기보다는 피상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아무것도 해결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근본 문제는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단지 전쟁을 못하게 하는 노력만으로는 사람과 사람 간에 인종과 인종 간에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합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제일의 중심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이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요.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끊임없이 다툼과 분쟁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이익이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다른 이들의 이익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에 어떻게 화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노벨 평화상을 받은 자도 자신의 지도자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다른 인종을 학살하는데 동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외적인 노력으로는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의 제일 근본 문제인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2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로를 대신하여 간창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언제나 순서는 동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 먼저 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만이 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들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화목하게 하셨을까요?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3.1)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찬송에서 가사에 평강의 왕이 이 땅에 오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평강의 왕을 보내사 화목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3.2)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평강의 하나님을 닮은 자녀들이 됩니다. 그들의 화평하게 하는 자들로 사는 것은 그들의 삶이 거룩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분리된 또는 구별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의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되어진 존재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거듭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죄로 인해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신자와 불신자는 서로 구별된 존재인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흠이 없는 자로 보전되는 것입니다.
4.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4.1) 화평하게 하는 자는 영어로 Peacemaker입니다. 말 그대로는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현 시대의 개념으로는 전쟁을 멈추게 하는 자, 다툼을 멈추게 하는 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평화의 의미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올바른 의미는 Harmony, 샬롬을 만들어 내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샬롬은 우리나라 말로 평화이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사람들 간에 관계성에서도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행동하기에 화평한 관계를 이루기보다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다행히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평화가 깨어진 세상에 평화를 이루실 왕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다른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에게 이웃과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받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살 때 이 샬롬을 누리지도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노력을 할 뿐입니다. 이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의 삶은 정말로 힘든 것이 분명합니다. 언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막연함만이 있으며, 이 화평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는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4.2) 그러면 우리는 언제 진정한 샬롬(평화)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가?
진정한 샬롬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진정한 평강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원수들을 다 심판으로 없애는 재림의 날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마음 속에 새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샬롬(평화)은 단지 전쟁이 멈추고 다투지 않으면서 우리를 대적하고 신경을 긁는 사람이 여전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실 진정한 샬롬(평화)은 원수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림 때에 성취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샬롬(평화)은 우리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존재적인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시대에는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현시대의 평화는 단지 임시 휴전일 뿐입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들이 다 없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09:1-13.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그가 빨리 죽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이 시를 우리는 저주의 시라고 부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의 대적, 즉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를 완전히 제거하여 주사 왕에게 평강이 있기를 바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용서하라는 명령은 다음에 이것에 균형을 이루어 설교를 하겠습니다.)
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이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죄가 여전히 있으며,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를 이유 없이 공격하여 손해를 보게 하고 마음에 엄청난 아픔을 주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5.1)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마음이 상하게 되었을 때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자신은 죄인이었던 사람으로 하나님의 화평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은 자임을 묵상해야 합니다. 특히나 자신 안에 생기는 불평들은 자신에게 먼저 말하고 다른 이에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5.2) 자신에게 말한다는 말은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지만 옛 사람의 습성대로 화를 내고 보복하고 싶어하는 마음에게 말한다는 말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다가 상처를 받고 낙심할 때 자신의 마음에 명령을 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야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11). 이렇게 자신의 옛 사람의 본성을 잠잠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두개의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기 전의 옛 사람의 본성이 있어 습관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있고,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본성입니다.
5.3)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의 첫 걸음은 먼저 자신을 낮추고 (자신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화평을 위하여 고통과 상처를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하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자신을 위해 사는 자들' 속에서는 이상한 자들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나 믿더라도 아직도 옛 사람의 본성대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참 성도들에게 많은 상처를 줄 것입니다. 세상말로 성도들을 호구로 취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화평하게 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언제나 불리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우리 보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로 어느 순간에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싸우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로 싸우는 전사가 돼야 함은 당연합니다.
저의 생각입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긴 여정에서 다른 이들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오래 참는 인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아갈 때 받게 되는 여러 가지 고난을 인내를 가지고 화평하게 하는 자로 끝까지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6. 마지막으로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6.1)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 모든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웃으며 사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믿음의 싸움을 싸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고의로 가리고자 하는 자들과는 싸워야 합니다. 진리를 막고 불의를 조성하는 자들에게 눈감는 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는 불의한 자들과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시편 109편의 다윗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의 믿음의 싸움을 위한 전신 갑주를 입고 싸워야 합니다. 불의한 자들을 잘 분별하여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믿음의 싸움이 있을 때 진정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실제 육신으로는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성도들에게 요구한 것은 믿음의 싸움을 힘써 싸우라고 권한 것입니다.
유다서 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 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세상이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르게 성경에서는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과 평화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거나 왜곡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단호히 싸워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갈라디아서 1:8절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으라고 편지를 통해 교회에 공식적으로 전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화평은 하나님의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불의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1:3)
그럼에도 화목하게 하는 하는 자가 되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로마서 12:17-18.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고,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6.2) 그러나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한 싸움의 범위에는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는 자들과 싸우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의 명예와 나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는 정말로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하는 자로 살아 가도록 도움이 되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싸우지 마시고 주님을 위하여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나를 위해 싸우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싸우는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과 말씀에 분별력이 완벽하지 못하므로 이 싸움에서 주님을 위하여 싸워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참음으로써 손해를 감수하고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 것인지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요.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짧게 요약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평강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평강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게 화평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평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교회를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