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6.2026. 주일설교 이증복 목사
본문: 누가복음 4:14-30
제목: 눈과 귀가 어두운 사람들
누가복음 4:14-30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 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사람은 익숙한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 근처에서 운전하는 경우가 가장 적절한 예가 될 것입니다. 집 근처는 늘 다니던 길이기에 운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늘 보던 풍경이라 다른 차의 이상행동을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이 떠들며 뛰어가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집 근처에서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이유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에게 예수님과 성경 말씀이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러나 익숙함이 우리 성도들을 영적으로 눈과 귀가 멀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알았지만 영적으로 눈 먼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오래 보았던 사람들,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갈릴리 나사렛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정작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메시아의 도착을 알리는 선언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1. 예수님은 성령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셨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도, 세례를 받으셨을 때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친히 유대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좋아하는 것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 들이는 믿음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하며 가르친 위대한 스승으로 칭송을 하지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 출석을 하여 말씀을 듣고 환호하는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2. 예수님은 예배 공동체를 사랑하사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2.1)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 이르사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회당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신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매 주일 예배 참석하여 하나님을 만나며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2)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 출석하는 것에서 오는 유익입니다.
첫번째 유익은 우리는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간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교제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예수님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유익은 참석하는 교회를 통해 신앙의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출석을 하면, 우는 사자와 같이 성도의 믿음을 삼키려고 하는 마귀의 위험이 눈 앞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유익은 예수님 당시 정규적으로 회당에 참여하였던 자들만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다는 선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소식을 제일 먼저 교회에서 듣게 되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과 58장의 말씀을 선택하셔서 자신이 이 땅에 무엇을 위해 오신 자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3.1)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로 인한 영적 빈곤을 아는 사람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3.2)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인 사람은 모두 다 죄의 포로로서 사탄의 포로입니다. 예수님을 이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의롭게 하시는 구원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3.3)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은혜의 해는 다른 말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입니다. 희년은 일곱 안식년 다음 해입니다. 안식년이 7년마다이고, 이것이 7번이면 49년입니다. 즉, 50년째 해를 말합니다. 희년에는 빚이 탕감됩니다. 종이 자유를 얻습니다. 팔렸던 땅이 원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희년이 되어 죄의 빚을 탕감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죄의 종이었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잃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기쁨의 해입니다.
3.4) 예수님은 이사야 말씀을 읽으신 후에 한 문장으로 설교를 끝내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깨닫고 수백년(600년) 이상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 한 회당에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던 메시아가 자기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지금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에 환호하였을까요?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긴 그들의 반응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나사렛 사람들은 기다리던 메시아의 도착 선언에 찬 물을 뿌린 것입니다. 그들이 했어야 하는 반응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가 아니라, "아멘!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은혜의 해가 선포되는 순간에도 나사렛 사람들은 눈과 귀가 어두워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4. 눈과 귀가 어두웠던 나사렛 사람들은 메시아에게 기적만을 행하기를 바랬고, 예수님의 책망에 오히려 메시아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에서 한 기적을 여기에서도 해 보라” 고 말할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메시아가 오신 소식보다 기적을 원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원하는 이적으로 그들의 관심을 얻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때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북 이스라엘은 정말로 악한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교만했고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은혜를 이방인에게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이사야의 말씀이 메시아가 하실 일에 대한 예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신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들을 악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아닌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보냈다는 책망은 정말로 잘 알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언제나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뜻을 더 우선에 두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관심 밖의 일입니다. 그래서 복된 소식이 바로 앞에서 전해져도 듣지 못합니다. 메시아가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자신을 책망하는 것에는 어느 것보다 더 민감하게 잘 알아 듣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책망에 크게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동네 밖의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이후에 예수님께서 다시는 나사렛 동네에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첫 설교이자 마지막 설교였습니다. 어떤 거절은 다음이 없는 마지막일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5. 적용과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나사렛 사람들의 실패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되게 하고자 함입니다.
5.1) 우리 성도님들은 성경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익숙함이 우리의 믿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회당)에 오래 다닌 것이 믿음이 좋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이 믿음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설교나 간증을 많이 듣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오래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사야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나는 다 안다,“ ”이 말씀은 이미 여러 번 들었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영적인 눈과 귀가 닫히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새롭게 하고 말씀을 새롭게 들어야 합니다.
5.2) 우리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복된 소식을 들었으나 알아듣지 못했고, 기다리던 메시아를 보았으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책망은 즉시로 알아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죄와 교만으로 마음이 완악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완악해진 마음은 자신을 책망을 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대신 책망하는 예수님에게 분노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의 말씀을 듣고 분노가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면, 즉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의 완악함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인을 자유롭게 하고 눈먼 자의 눈을 열어 주시고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는 구주 예수님을 날마다 더 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늘 읽고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매일 예수님의 사랑을 새롭게 보고 듣는 그리고 경험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