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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26 주일 설교.
의로운 판단을 하라.
누가복음 6장 37절 - 45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눅 6:37–45)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실로 ‘판단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 순간 사람들은 타인의 말과 행동을 평가하고, 소셜 미디어와 뉴스 댓글 창에서는 타인에 대한 날 선 비판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남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쉽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향한 비판이나 평가는 견디지 못하는 모순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하신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정말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분별도 하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경이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라고 가르치는 수많은 구절과 모순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단순히 "판단하지 말라"며 침묵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편견과 위선을 벗어던지고 진정으로 올바르고 의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관대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눅 6:37–38)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성도가 도덕적 분별력이나 선악의 구분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타인을 향해 칼날 같은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먼저 '관대함'을 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아픔 속에서, 어떤 마음의 동기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 편협함을 보여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머니들이 모여 자식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분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합니다. "내 며느리는 정말 게을러서 남편이 출근할 때 아침밥도 안 차려주고 빨래도 안 해줘. 심지어 집안 청소는 내 아들이 퇴근해서 하게 만들더라고요. 내가 며느리를 잘못 들였어요!"
그런데 잠시 후, 그 어머니는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딸은 시집을 참 잘 갔어. 사위가 아침도 혼자서 잘 챙겨 먹고 출근하고, 집안 청소며 빨래까지 사위가 다 해준대지 뭐야. 내 딸이 결혼 정말 잘했지!"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딸과 며느리는 동일한 상황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토록 극단적인 평가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어머니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딸을 향해서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며느리를 향해서는 엄격하고 날 선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37절의 가르침은 타인에 대한 모든 비판 자체를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의 허물과 부족함을 바라볼 때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38절의 말씀도 이 관대함의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 구절은 기복주의적 신앙 안에서 자주 오용되곤 합니다. 마치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부를 몇 배로 채워주신다는 투자 보증 수표처럼 왜곡되어, 성도들의 헌금을 부추기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헌금의 양을 다루는 경제적 원리가 아니라, 앞 절의 인간관계 및 영적 태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마음과 너그러운 태도를 베풀 때, 우리 역시 다른 이들로부터 관대함과 긍휼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대하실 때 우리가 타인에게 베푼 그 관대함을 띠라 우리를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타인의 허물을 끝까지 파고들며 엄격하고 가혹하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남에게 행한 그 엄격한 척도대로 우리의 허물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저 긍휼과 관대함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2. 우리는 누구를 따를 것인지 조심해야 합니다 (눅 6:39–4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영적으로 올바른 스승과 인도자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인지 일깨워 주시기 위해 생생한 비유를 던지십니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맹인이 또 다른 맹인의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하는 장면입니다. 처음 몇 걸음은 어찌저찌 걸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코앞에 다가온 깊은 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맹인의 인도는 진리를 모르는 거짓 교사나 지도자가, 마찬가지로 진리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끌어가는 참담한 상황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거대한 진실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삶과 가치관을 따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말투, 태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맹인과 같은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를 따르게 되면 우리는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진정으로 누구를 존경하며 따르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마음으로 따르는 그 사람은, 지금 여러분을 영적으로 어디로 데려가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늘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그의 생각에 동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역시 비판적인 사람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늘 주변 사람의 약점과 흠집만 찾아내는 이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우리 또한 어느새 남의 단점만 스캐너처럼 찾아내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모든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를 추종한다면, 우리 안에도 불신과 냉소가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랑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간다면, 우리는 관대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로 믿음이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들보를 먼저 빼야 합니다 (눅 6:41–42)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이 비유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살피고 행동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타인의 아주 사소한 허물과 티끌 같은 실수는 매섭게 찾아내어 잘못을 고쳐 주려 합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가 실수하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을 하는 자신의 문제는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잠시 교만한 태도를 보이면 금방 그 교만함을 지적하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정작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오만함과 고집은 전혀 발견하지 못하여 자신의 교만함을 고치지 못합니다. 다른 형제가 분노할 때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참지 못할까"라며 형제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화를 낼 때는 "이건 거룩한 분노요, 정당한 권리다"라며 자신의 분노를 합리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엄중히 경고하시는 '외식(Hypocrisy)' 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는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어 주는 도움을 주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언제나 시작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눈의 들보를(죄) 제거하기 위한 첫 걸음을 단순히 나의 들보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대개의 경우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단순히 나의 죄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 눈의 들보를 제거하는 첫 걸음을 공동체의 들보(죄)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포로의 삶을(들보를) 유대 민족이 당하고 있는 포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회복을 위해(들보를 제거하기 위한) 기도할 때, 먼저 자기 민족이 범했던 죄를 자신의 죄로 먼저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다니엘 자신을 포함하여) 범죄하여 허물을 범하여 악행을 행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나이다"(단 9:5)*라며 조상들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회개했습니다.
포로 귀환 후 공동체를 재건하던 에스라와 느헤미야 역시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자신의 허물로 여기며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느1:4-11, 스9:5-15). 
왜냐하면 민족이 범한 죄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가 되어 바벨론의 포로로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와 나라에 죄가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정결하게 살더라도 그 죄의 영향으로 평안한 삶과 예배의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나라가 갑자기 무정부 상태가 되던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자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의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신앙 생활이 어려워 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하신 말씀입니다.
주의 해야 할 것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고자 하는 것은 내 눈에 그 티가 거슬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형제를 눈 속의 티를 빼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 속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 공동체와 나의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빼고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비행기를 탈 때 듣는 안내 방송을 떠올려 보십시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승무원이 안전 수칙을 안내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비상 상황이 발생하여 기내 산소 마스크가 내려오거든, 먼저 자신의 얼굴에 산소 마스크를 단단히 착용한 후에 옆에 있는 어린 자녀나 타인을 도우십시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먼저 산소를 공급받아 호흡을 유지해야만, 산소 마스크를 쓸 줄 모르는 연약한 아이나 이웃을 살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먼저 회개로 정결하게 되어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 쓰러진 형제를 진정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 의로운 판단을 하기 위해 그 사람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눅 6:43–45)
끝으로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분별의 기준을 가르쳐 주십니다.
1)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의 본질과 정체를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봄철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른 잎을 틔우기에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결실을 맺을 때가 되면 진짜 나무의 정체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마트에서 흔히 보던 대추보다 훨씬 크고 탐스러운 대추를 발견하고 구매한 적이 있습니다. 모양은 비슷해 보였으나 입에 넣고 맛을 보니 우리나라 대추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종려나무에서 열리는 대추야자(Date)였습니다. 이제는 대추야자 열매를 가지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2)무화과가 열리면 무화과나무요, 포도가 열리면 포도나무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기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 역시 그 사람이 맺는 인격과 삶의 열매를 통해 그 정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은밀한 마음속 동기를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반복적으로 맺는 말과 행동의 열매를 통해 그 마음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엄숙하게 선언하십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 사람의 입에서 평소 어떤 언어가 흘러나오는지 보십시오. 그가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행하는지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 동기를 함부로 재단하고 단정 지어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과 삶의 열매를 보고도 아무런 영적 분별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영적인 나태함이자 잘못입니다. 
그러나 만약 본문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여 타인의 열매를 보고도 분별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곧 이어지는 "열매로 나무를 알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모순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판단을 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대원칙은 이것입니다.
성급한 판단보다 먼저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의 열매로 그 사람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알 수 있나니,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는 선한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선한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을때만 선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은 선한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에서 선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물론 도덕적인 선을 포함합니다.
5.결론: 의로운 판단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37절부터 4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의로운 판단의 네 가지 원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비판하기보다 관대한 마음과 태도로 형제가 한 행동을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판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코 진리를 모르는 맹인과 같은 사람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공동체와 자신의 들보를(죄와 잘못을) 먼저 파악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성급하게 하지 말고, 그 사람의 열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은 선한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날마다 의로운 판단과 실천으로 예수님을 날마다 닮아 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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