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26 주일설교. —신앙의 확증 편향의 위험
본문: 누가복음 6: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들이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정보와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참 신기하고도 위험한 심리적 경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이미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만 골라서 보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릅니다.
확증 편향은 단순히 정보를 잘 몰라서 오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내 생각, 내 믿음, 내 판단을 굳게 지키기 위해 내 입맛에 맞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내 생각과 부딪히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축소해 버리는 교묘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을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저 사람 또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라며 삐딱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이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도 "오죽했으면 그랬겠어"라며 너그럽게 포장해 줍니다.
문제는 이 확증 편향이 우리의 일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룩해야 할 신앙생활 속에도 그대로 파고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렵고 떨림으로 듣기보다, 내가 이미 정해 놓은 생각과 욕심을 지지해 줄 성경 구절만 골라 잡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내 좁은 생각이 깨지고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을 내 주장의 무기로 삼아 내 생각을 정당화하는 어리석짓을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6-11절의 본문은,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둘러싸고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깊은 확증 편향에 빠져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거울을 들여다보듯 우리의 영적 상태를 깊이 점검하고, 우리의 고집과 편견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바리새인들의 왜곡된 시선과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1)안식일의 본질을 잃어버린 현장 (6:6-7)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앞선 6: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바리새인들과 날카로운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파격적인 논쟁이 끝난 뒤, 또 다시 안식일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곳에는 오른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형편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시 육체적인 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일상 속에서, 오른손이 말라버렸다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을 넘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한 손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은 손을 다쳐 깁스를 해본 분들이라면 그 답답함과 힘듬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깊은 고통과 한숨을 안고 회당 한구석에 나와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가 왜 거기에 왔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고통받는 사람을 정확히 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이라는 거창한 종교적 공간 속에서, 종교인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한 구석에서 신음하는 영혼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이는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함이더라."
그들의 눈은 병자의 아픔이나 눈물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목적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아인지,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배우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결정적 증거를 잡아 어떻게든 고발하겠다'는 악한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병든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참된 안식을 선물해야 할 소중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병든 자와 치유의 기적은, 자신들의 삐뚤어진 율법적 판단을 입증해 줄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같은 현장을 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은 '생명의 눈'으로 보았고, 바리새인들은 '정죄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확증 편향의 무서움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이미 내면에 자리 잡은 편견과 선입견의 색안경을 통해 모든 것을 왜곡해 버리는 것입니다.
2)침묵으로 진리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6:8-10)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악한 생각과 의도를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으시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는지라."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뼈아픈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단순히 "안식일에 응급 처치를 해도 되는가?"라는 형식적인 규정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 안식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과 본심은 완전히 놓치고 있음을 예리하게 찌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만 하다가 지친 육신을 쉬게 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은혜를 누리며, 이웃을 향한 긍휼을 베풀라는 축복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인간을 옥죄는 족쇄로 만들어 버렸고, 고통받는 사람이 눈앞에 있어도 규정에 얽매여 치료하지 못하게 막아 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협한 안식일 해석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에, 그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예수님을 마치 하나님의 적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질문 앞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침묵)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들의 침묵은 겸손의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회개의 침묵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모순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워 악물고 버티는 방어적 침묵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일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면 안 됩니다"라고 대답하자니, 자신들의 율법주의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지 만천하에 폭로되는 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완고한 침묵을 깨고 마른손을 온전히 고쳐 주셨습니다.
3)분노와 적대감으로 치닫는 결말 (6:11)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마땅합니까? 평생을 장애로 고통받던 이웃이 치유되었으니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노하며 고발을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의 마음이 이미 예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선한 일과 기적을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들 마음속에 내려놓은 결론에 맞춰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억지로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눈앞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예수님의 선행조차도 자신들의 적대감을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확증 편향이 신앙 안에서 극단적으로 타락했을 때 나타나는 무서운 말로입니다.
2. 확증 편향이 우리의 신앙을 왜곡하는 5가지 모습
바리새인들의 이 비극적인 모습은 결코 먼 나라의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우리 안에도 이 확증 편향이 스며들어 영적 눈을 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서 확증 편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1)듣고 싶은 말씀만 편식하게 만듭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위로와 약속의 말씀도 있지만, 우리의 숨은 죄를 예리하게 도려내고 회개를 촉구하는 책망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증 편향에 사로잡히면 나에게 복을 주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씀만 꿀처럼 삼키고, 내 양심을 찌르는 진리의 말씀은 "저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야 할 말씀이야"라며 이웃에게 떠넘겨 버립니다.
2)타인을 향한 판단과 정죄의 눈을 왜곡합니다.
특정 성도나 목회자, 혹은 이웃에 대해 이미 부정적인 선입견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의도로 행동해도 그것을 비틀어서 해석합니다. 그가 잘한 일은 "요조숙녀의 가증한 연기" 정도로 치부하고, 사소한 실수나 부족함은 "저 사람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며 가차 없이 매도합니다. 반대로 내가 편애하는 사람의 치명적인 죄는 "실수할 수도 있지"라며 한없이 너그럽게 덮어줍니다.
3)교회 공동체 안의 갈등과 분열을 키웁니다.
교회 안에서 의견 조율이 안 될 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집단이나 사람이 제안하는 내용은 내용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저 사람이 또 우리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저런다"라며 그들의 '순수한 의도'를 먼저 의심합니다. 상대방의 정당한 지적이나 쓴소리도 나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충고로 받지 않고, 나를 찌르고 무너뜨리려는 '공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결국 대화의 문은 닫히고 서로의 진영 논리만 강화됩니다.
4)진정한 회개와 돌이킴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무릎을 꿇는 회개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확증 편향은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내 삶에 문제가 생기면 내 안을 들여다보기보다 "상황이 이래서 어쩔 수 없었다"며 환경을 탓하고, 남의 탓을 하며, 어떻게든 나를 정당화할 방어 논리만 개발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할 사람이, 도리어 남을 심판하는 교만한 재판장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5)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거부하는 영적 눈먼 상태를 만듭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똑똑히 보았고, 귀로 생명의 말씀을 들었으며,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쥐고 있던 전통적인 규례로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짜 위기는 지식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옛것에 사로잡혀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4. 적용과 결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시선을 바리새인들에게서 거두어 우리 자신의 마음속 거울을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바리새인들을 향해 쉽게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이 눈앞에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는데도 저렇게 눈이 멀어 분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악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 성령님은 우리에게 조용히 질문하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너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느냐, 아니면 네 고집과 네 편견을 확인하고 싶어 하느냐?"
우리가 교회 생활을 오래 할수록, 내 경험이 많아질수록,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의 자리에 앉기 쉽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신앙적 견해나 방식을 접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거룩한 기회인지 살피기보다 "어디 저런 이단 같은 소리를 하느냐"며 내 생각을 사수하기에 바쁩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던져야 할 질문들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께서 이 시대와 내 삶 속에서 행하시는 생명의 역사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이미 정해 놓은 내 생각과 편견만 확인하려 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내 주장을 지지해 줄 말씀만 골라 듣고 있는가?"
"나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감정과 선입견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재구성하고 있는가?"
"나는 타인의 말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애쓰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반박할 꼬투리와 근거만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가?"
바리새인들은 생명이 살아나는 위대한 역사를 목격하고도 자신들의 생각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 진리를 없애려고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극을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진리에 대한 진짜 확신과, 꽉 막힌 확증 편향은 하늘과 땅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무릎을 꿇게 만들고, 내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하며, 날마다 예수님 품으로 더 깊이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확증 편향은 내 좁은 판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진리를 내 마음대로 이용하게 만들고, 이웃을 정죄하며, 끝내 주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나이가 들고 직분이 올라갈수록 내 주장이 더 쎄지고 내가 절대로 틀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이란, 내 모든 생각과 판단, 내 자존심과 고집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마음 앞에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통해 마음속에 꼭 쥐고 있던 고집과 내 편견을 깨뜨리시는 성령님의 음성 앞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드리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품으며, 날마다 말씀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