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26 주일예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5:33-39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도전적인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의 도전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하는 손님은 잔치를 즐겨야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대화를 끝맺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은 금식이 필요 없다거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이 단순히 더 지혜롭다는 실용적인 조언이 아닙니다. 또한 오래된 포도주가 더 맛이 좋으니 오래된 것을 고수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핵심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우리는 그 새로운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의 현실적인 반응은 "옛날 것이 좋았다"며 새 것을 거부한다는 데에 본문의 뼈아픈 교훈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여전히 레위의 집에서 열린 잔치 자리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시의 유명한 선생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따져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은 명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가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불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럼에도 그들은 불만을 거두지 않고 제자의 금식 문제를 꺼내어 지적합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니이다.” 즉, 당신은 제자들에게 경건을 위한 금식도 가르치지 않는가 하는 비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며 분명하게 답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단순히 지금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그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취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립니다. 옛 시대의 전통과 슬픔의 표현이었던 금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구속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금식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자신의 죄와 민족의 죄를 회개하며 강제적인 금식을 했습니다. 또한 개인의 슬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구, 국가적 위기 앞에서 자발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 세상은 혼인 잔치와 같은 시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잔치의 기쁨을 누리기에 금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빼앗기는 그 날,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인 이유로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금식은 마지막 혼인 잔치가 완성되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끝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의무적으로 대속죄일에 금식할 필요는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도가 자발적으로 금식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미 새 시대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금식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금식이 기도 응답을 확실히 받는 비결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믿음 좋고 영성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금식을 사용합니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금식을 오래, 자주 한 사람이 더 경건하고 기도를 잘할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40일 금식기도를 경험한 이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카고에 사는 한 여집사는 40일 금식기도를 세 차례 한 후 여러 교회에서 집회 강사로 초청받아 활동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을 따라 저도 그 집회에 두 번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정도가 지난 후 그분의 안부가 궁금해 물어보았더니, 집을 개조해 기도원을 차리고 본 교회는 출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자기 담임목사의 말씀이 영성이 없고, 하나님께 응답받은 자기 말을 목사님이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 금식은 신앙의 유익이 아니라 치명적인 해가 되었습니다.
은혜의 새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도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죄와 싸우기 위해, 그리고 선교적 목적과 교회를 위해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을 보면 초대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장로들을 세울 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2. 우리가 하는 금식과 봉사가 우리를 바리새인으로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란 자신의 행위로 의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리새인이 가장 많이 서식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율법에 열심히 순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마음에 “나는 이렇게 많이 봉사했는데 저 사람은 왜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그 사람은 바리새인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나는 저 사람보다 기도를 많이 한다”며 비교하고 자부심을 갖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자신이 이룬 열심을 자신의 의로 삼고 우쭐해지는 순간, 우리 누구나 바리새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장 쉽게 바리새인이 양산되는 곳은 규칙이 많은 교회입니다. 교인들을 위한 제자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규칙을 만들고, 지키면 훌륭한 제자, 못 지키면 아직 부족하고 더 훈련받아야 할 교인으로 낙인찍습니다. 이런 방식은 눈에 보이는 통제가 가능하기에 처음에는 효과가 있어 보이지만, 정작 신앙생활의 진정한 기쁨을 질식시킵니다.
제가 처음 다녔던 교회는 정말 점검받는 항목이 많았습니다. 구역장들이나 청년회장은 회원들이 읽은 성경 장수를 체크해 점수를 매겼습니다. 헌금의 종류도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 구역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 다양했고 그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습니다. 일주일에 몇 명을 전도했는지 보고서를 내야 했습니다. 저는 정말 성실하게 그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기쁨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도 모르게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형제자매를 책망하며 믿음이 약하다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새 교회 안에서 열심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뒤에서 조용히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이름 없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는 것 자체에서 하늘의 즐거움을 맛보도록 돕는 것, 그것이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진짜 모습입니다.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옷과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 명확한 진실을 가르치십니다.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구원의 시대와 그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종교적 공로와 율법적 행위에 의존하는 옛 종교의 틀을 뜻합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을 찢을 뿐이라”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존 종교 체계에 작은 액세서리처럼 덧붙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느니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구원의 실재를 과거의 낡은 종교적 틀과 율법주의 체계에 억지로 우겨넣어선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정리하자면, 메시아를 기다리며 지키던 옛 종교적 방식들은 이제 성취된 새 언약의 실제 앞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만약 성취된 새 언약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종교적 공로주의를 붙들고 살아가려 한다면,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 모두를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새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거나 옛 관습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적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4. 교회 역사를 통해 본 은혜의 남용과 행위주의의 오류
초대교회 이후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선포될 때마다, 사람들은 이를 곡해하여 두 가지 극단적인 오류에 빠지곤 했습니다.
첫째는 은혜의 남용입니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 어거스틴은 “인간은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행하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왜곡하여 “어차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면 도덕적으로 어떻게 살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라며 방종에 빠졌습니다. 실제로 어거스틴의 교구민 중 일부는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자랑하여 주위에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은혜 강조론에 반발하여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순종을 극단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인 의존이 아닌 자신의 자유의지와 노력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이는 은혜가 남용되는 세태를 비판하려는 의도였으나,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구원에 영향을 주는 치명적인 이단이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오류 속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구원의 근본적인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이제 그 은혜에 감격하여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순종의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나 '공로'로 내세우는 것은 잘못입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열매로 맺는 것과 같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딱 붙어 있는 가지는 자연스럽게 포도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나무가 결단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
5. 불행히도 사람은 새로운 은혜보다 익숙한 묵은 것을 더 좋아합니다.
누가복음 5장 3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왜 사람들은 새 포도주보다 묵은 포도주를 더 찾을까요? 물론 이 말씀은 포도주 품종에 대한 요식업적 평가를 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비유의 결말을 “사람들이 묵은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는 인간의 경향성으로 끝맺으신 이유는,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는 인간의 완악한 속성을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경영학 학생들이 식당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방과 홀의 구조를 전면 개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식당은 불과 일주일 만에 원래의 낡은 구조로 원위치하고 말았습니다. 종업원들이 옛 방식이 더 편하고 새 구조는 불편하다고 사장에게 끊임없이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달 정도 새로운 방식을 인내하며 체득했다면 훨씬 더 효율적이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옛것,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 시대, 즉 '은혜의 시대'를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은혜의 시대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와 노력도 일절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6. 결론입니다.
우리의 죄로 물든 마음은 늘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금식을 두 번 했고, 십일조를 빠짐없이 드렸고, 식사 봉사를 했고,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 빠졌다”고 은근히 내세웁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모든 자랑을 완전히 바닥에 내려놓게 만듭니다.
“너의 의와 열심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을 완벽하게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를 보태기 위해 율법의 옛 방식을 붙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의이자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내 열심'이라는 낡은 부대를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공로와 자부심을 조용히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새 포도주의 은혜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