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5.2025. 주일설교 이증복 목사
본문: 마태복음 5:1-6
제목: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 5:1-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제가 대학교 다닐때 소속되어 있는 선교 단체는 매년 12월 27 저녁에서 1월 1일 아침 식사까지 400-500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금식을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금식할 때 대개 2-3일이 지나면 배가 엄청나게 고프고 힘이 없습니다. 금식을 하는 동안 저희는 성경공부 자료들을 비닐 봉지에다 담아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비닐 봉지를 들고 일어나거나 앉거나 할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리가 과자 봉지 뜯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특히, 새우깡 봉지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심지어 제 친구는 성경 강의를 하는 동안 메모지에 강의를 받아 적지 않고 자기가 금식이 끝나면 먹을 음식을 적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친구는 그것을 먹을 순서로 나누어서 금식 후 1일에 먹을 것, 2일째 먹을 것 등등으로 다시 적었습니다. 드디어 금식 마치는 날이 왔습니다. 1월 1일 아침에 경건하게 침을 흘리며 죽을 기다리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다행히 금식 후의 주의 사항을 알려 주시는 내용으로 짧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금식 후에 너무 많이 죽을 만들어 놓지 않는 것이 섭식에 성공하는 비결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금식이 끝나고 음식을 먹더라도 우리 위는 여전히 음식이 부족하다고 신호를 보내므로 자신도 모르게 더 많은 음식을 계속해서 먹게 될 것이며, 그 끝은 식욕에 굴복하는 자신에게 실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3명의 선교 단체의 친구들과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금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죽을 세 명이 세 끼 먹을 분량을 끓였습니다. 같이 한 그릇을 먹고 우리는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 점심은 끝이니 더 이상 먹지 말자. 그리고 나서 저녁이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죽을 끓여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저녁이 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서로 몰래 죽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이렇습니다. 죽을 먹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소변이 마렵습니다. 당시 자취방에 화장실은 조금 떨어져 있었고 그 곳을 가려면 부엌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저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화장실을 가면서 죽 냄비를 열고 크게 국자로 퍼서 먹습니다. 물론 볼 일을 보고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먹었기 때문입니다. 금식을 3일 정도만 해도 우리의 위는 음식을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사실 제가 금식을 5일 간 한 경험으로는 '금식을 하는 동안에 음식에 대한 욕구'와 '섭식으로 죽을 먹을 동안의 욕구' 둘 중에서 섭식 기간 중 음식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당시 우리가 만든 죽은 콩나물과 소금만으로 만든 죽이었습니다. 금식이 끝나고 처음 죽을 먹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식욕이 솟구쳤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때도 한 모금이라도 죽을 먹는 순간 그 죽에 대해 너무 심한 식욕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우리 세 친구의 다짐이 무력화된 이유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다가, 제가 경험한 금식 기간과 금식 후 음식을 정말로 먹고 싶고 마시고 싶었던 당시의 상황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상황과 유사한 것이라 여겨졌기에 금식의 예를 들은 것입니다.
의란 무엇인가?
1) 먼저 의에 대한 것을 아시기 전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들의 문제를 살펴 보겠습니다.
세상은 혼란과 폭력과 사기 그리고 지역 간의 갈등, 더 나아가 정치적인 갈등까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계몽적인 수단을 교육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들이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에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을 하고자 활동하는 NGO 단체들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서로 간의 문제를 전쟁 대신 대화나 중재로 해결하기 위해 UN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교육이나 사회 분위기에 의해 행동을 올바르게 하기도 합니다. 또는 나라 간의 갈등은 국제적인 중재를 통해 그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잠시 간의 성과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므로 다시금 원래의 죄의 종으로 되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한 중재를 따르기를 거부하면 몇십년간의 노력들이 한 순간에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한 이유는 사람의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는 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과 노력으로는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 이제 의란 무엇인지를 설명을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는 의입니다. 의에 대한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된 의인이라 하나님이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칭의라고 부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된 모든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서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즉, 죄 문제가 해결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한 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 그러나 의로운 것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언적인 의입니다. 말하자면, 여전히 죄인인 자를 위해 의인이신 예수께서 죄를 대신 지신 것으로 인해 선언되어진 의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죄인들에게 오직 값 없이 베푸신 의입니다. 그 결과로 죄인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죄인입니다. 주변의 성도들과 문제를 일으키며 죄를 짓고 있더라도, 그는 성도 - 거룩한 자라 불리지만 여전히 그러한 신분에 아직 못미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라는 선언 받은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나 자녀로서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주님을 닮아 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거룩한 자 즉, 성도라는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의로운 삶을 날마다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우리는 성화되어 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생기는 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갈망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여 구세주가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었음을 진실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4) 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 중에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의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 받은 의인이 되고, 또한 의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는 단순히 개인적인 범위로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이해를 위해서는 구약에서 찾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의 의에 대한 많은 말씀들은 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곳인 사회 공동체 속에 있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에게 행동하는 의입니다. 이 힘 없고 버림받은 이들을 언약 공동체 안에서 그들에게 합당한 대우와 자리로 회복하게 하는 것을 공의를 행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의는 정의와 함께 쓰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편 82:3,4.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아모스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 당하는 소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약한 자와 병든 자들의 친구로서 그들의 병든 몸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임을 알게 하여 죄의 종에서 진정한 해방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실천하신 의입니다.
5)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지만 마치 의로운 사람인 것으로 보여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엄하게 책망을 하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의 율법을 잘 지키며 행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은 예수께 정죄를 받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외식하는 자 또는 위선자라는 의미는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고 의로와 보이지만, 실제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먼 자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모습을 회칠한 무덤이라 부르셨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아이폰 최신형을 구입했는데 판매자가 구형의 아이폰에다가 신형의 케이스로 겉포장을 바꾸어 판매하는 아이폰을 산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전화기를 사게 되었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정말로 잘 지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에게도 강요를 하여 지키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 마음은 하나님의 참된 의(긍휼과 자비를 베푸는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의 사정은 전혀 살피지 않았습니다. 오직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심을 가지며 지키지 않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에 열심이었을 뿐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 참석을 빠지지 않습니다. 새벽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물론 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한 보여주는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의 신앙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교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적인 우월감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대한 갈망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에 오랜동안 출석을 하신 성도들 중에서 자기도 모르게 바리새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가 예수의 복된 제자로 살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지를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금식을 해 보신 분들은 금식 때의 음식에 대한 욕구를 떠올려 보십시요. 더운 여름날에 밖에서 운동을 해 보신 분들은 많은 땀을 흘리고 나서 오는 갈증을 떠올려 보십시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와 같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를 채워주시어 배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의에 대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6) 성도들이 의를 갈망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5:27.
자기 앞에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예수의 신부인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의를 갈망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거룩하신 신랑이신 예수님과 결혼을 하게 되는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돌아오시는 그 날에 혼인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지체가 되어 예수의 정결한 신부로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의를 이루어 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 다른 면에서 의에 대한 갈망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은 의를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의로 배부르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우리가 먼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원리는 이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갈망은 아주 미약하게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신앙적인 원리들은 언제나 처음은 미약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하나와 같은 작은 시작을 한 것과 같습니다.
의에 대한 갈망은 처음에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에서 시작을 합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애통해 하며 죄를 버리고 의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의를 채워주시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의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은 더욱 더 의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의로 배부름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큰 은혜로 베푸사 의로 그를 채워 주십니다. 이것이 의가 증진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의에 대한 갈망이 시작될 초기의 신앙의 시작에서 세상일에 바빠서 의에 대한 갈망을 무시하고 교회에 출석을 하는 정도로 만족을 하는 자들은 이제는 처음에 가졌던 의에 대한 갈망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 설교를 듣기만 하는 성도들이 됩니다. 그리고 연식이 되어 교회의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교인들에게 새 신자가 와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바라고 질문을 하게 될 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이 됩니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외식하는 자의 신앙을 가르치기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로 누가복음 11장 9,10,1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의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의를) 주실 것이요. (의를)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