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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1일 주일설교
본문: 누가복음 6:20–26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을 보여 주십니다. 한 길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다른 한 길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현재의 만족과 편안함과 사람들의 인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두 가지 삶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신앙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일입니다.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매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을 살 것인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 어떻게 돈을 사용할 것인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선택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무엇입니까?
“지금 나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영원한 관점에서 무엇이 가장 복된 것인가?”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세상의 즉각적인 만족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을 선택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복이 있나니.” 이 표현은 20절부터 22절까지 반복됩니다. 성경에서 같은 표현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 받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단순히 현재의 경제적 상태가 좋아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세상은 가진 것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좋은 집이 있어야 하고, 안정된 직장이 있어야 하며, 충분한 돈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가장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많아도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경적인 복은 현재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가가 진정한 복의 기준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족함을 영원한 만족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은 배고픕니다. 지금은 웁니다. 지금은 부족합니다. 지금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배고픔이 만족으로 바뀌고, 눈물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현재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네가 가난하니 복 받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아셨고, 그들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다만 현재의 고통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현재의 상태만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지금 돈이 많으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지금 건강하면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지금 웃고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만 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완성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고통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을 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눈물이 나지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닦아 주실 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실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에 큰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욕하고 거절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신앙적 선택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말씀대로 용서하다가 약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기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고난 자체를 좋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찾아다니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 복음을 위해 감당하는 희생,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겪는 손해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잊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가족도 우리의 희생을 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섬김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우리가 흘린 눈물도 아시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드린 기도도 아시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믿음을 지킨 선택도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보다 주님의 평가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복 받은 사람이고, 부자는 무조건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난 자체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부 자체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재물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입니다. 부유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쌓아 두지 않고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합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돈과 소유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소유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기준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동료 선교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짐 엘리엇과 몇 명의 젊은 선교사들은 오랫동안 기도하고 준비한 후 에콰도르의 정글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드렸습니다. 그곳에는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위험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선교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가족을 남겨두고 위험한 곳에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당시 몇몇의 언론들은 유능한 인재들이 무모한 선교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며 선교 사역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들은 복수와 미움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과 다른 선교사들의 가족들은 오히려 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서 섬겼습니다. 그 사랑과 헌신을 본 원주민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짐 엘리엇을 죽이는데 가담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후에 그리스도를 믿고 목회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선교사들이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삶이 결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2. 그러면 “화가 있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이제 복과 반대되는 화 있는 것에 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때 자주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인 사람에 대한 매우 심각한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왜 부자와 배부른 자와 웃는 자와 칭찬받는 자에게 이렇게 엄중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첫째,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욥도 부자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도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재물을 선하게 사용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재물이 하나님을 대신할 때입니다.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자신의 부를 자기 만족만을 위해 사용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할 때 문제가 됩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선을 행할 수 있는데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마지막 날에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배부른 자”는 자기 만족에 빠져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비교적 쉽게 음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배불리 먹는 것이 죄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과도하게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의 굶주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의 집 문 앞에는 가난한 나사로가 누워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했고,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부자에게는 모든 것이 넘치도록 있었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즐길 것도 넘치도록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자기 문 앞에서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나사로를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는 둘 다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물 한방울이 없는 영원한 갈증에 고통을 받게되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배만을 위한 결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주변의 가난한 사람과 외로운 사람과 소외된 사람을 외면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당을 가지고 있고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잃어버린 부자와 같은 존재일뿐입니다. 
셋째, 사람의 칭찬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했을 때 격려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실을 말하는 선지자보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거짓 선지자를 좋아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에게 임하고 있는 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지도자나 목회자가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전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목회자가 지도자로 있는 교회는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 주십니다.
첫 번째 길은 즉각적인 만족의 길입니다. 
부와 편안함과 인기와 즐거움을 지금 얻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즉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돈이 많으면 편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의 마지막을 경고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두 번째 길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자신을 내려 놓는 길입니다.
이 길은 때로 좁고 어렵습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 침묵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가난하고 배고프며 인기가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복이 있다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입니다.
4.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복된 길을 선택하여 가는 것이 어려울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된 길을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아는 것과 실제로 그 길을 걷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왜 어렵습니까?
첫째, 우리 마음의 성향이 즉각적인 만족에 너무나 끌리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휴대전화를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보다 세상의 자극적인 영상을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나 자신을 위해 돈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용서하는 것보다 분노를 붙들고 있는 것이 더 정당한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경향성이 우리로 복된 길을 가기 어렵게 합니다.
둘째, 영원한 복의 길은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포기해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후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꿈을 받은 후 곧바로 총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덩이와 노예 생활과 감옥을 지나야 했습니다. 다윗도 기름 부음을 받은 후 곧바로 왕좌에 앉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 사울에게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오랜동안의 기다림과 희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복된 길이 좋을 것임을 알고도 걸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것입니다.
셋째, 세상은 우리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을 매우 어리석은 삶이라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용서하면 약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면 세상은 그것을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우선하면 세상은 기회를 놓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조롱하는 방식이 하나님께서는 복된 길이라 하십니다. 사람들이 실패라고 말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자의 삶이라 칭찬하십니다. 사람들에게 헛된 희생처럼 보이는 선교사들의 죽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이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자신들의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일 수 있고, 세상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충성일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영원한 복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실제적인 지침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영원한 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첫째, 즉각적인 만족보다 하나님의 뜻과 영원한 가치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얻는 만족을 기준으로 급하게 결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 말씀에 합당한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가? 영원한 관점에서 가치 있는가?  질문을 먼저해야 합니다. 그런후에 결정을 하고 행동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당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신뢰하는 믿음이 더 성숙해질 것입니다.
둘째,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면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십시오
때로는 어느 길을 선택해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럴 때는 나를 제일 후순위에 놓고, “이 선택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다른 동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의 유익만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저는 한 교회에서 두 번의 사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두 번째 사임 당시 저를 위해 집사님들이 목사님께 항의하고 분노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동체가 분열되고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사임을 받아들이고 물러섰습니다. 개인의 억울함보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온전하게 세워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공동체속에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은 시간이 지나서 그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이 있는 자라는 증거가 됩니다.
셋째,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는 기도하며 충분히 기다리십시오
모든 상황이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하지 말아햐 하는 것은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사람들과 의논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정직하게 살피기 위해 자신에게 질문을 하십시요. 
“나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원하는 결정을 하나님께서 승인해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정말로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뜻을 관철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나의 뜻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성경을 꾸준하게 차근 차근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6.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단순한 교훈 하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된 길과 화있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즉각적인 만족을 주지만 결국 화가 있는 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길입니까?
그래서 복된 길을 가고 있는지 화있는 길을 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까? 돈입니까? 편안함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입니까? 성공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입니까?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원하고 있습니까? 당장의 만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복을 소망합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내 삶이 충분히 편안하기 때문에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어려운 선택을 할 때 나의 유익만 생각합니까, 아니면 가족과 교회와 공동체의 유익도 생각합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 않을 때 기도하며 기다릴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즉각적인 만족은 매우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부도, 세상의 인기와 칭찬도, 육체적인 즐거움도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마치 아침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만 바라보며 살지 말고, 영원한 복을 바라보며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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